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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인천 개항사 :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

본문

인천 개항사 :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
저자 나채훈, 박한섭 공저
발행일 2006년 10월
ISBN 8991359426
정가 15,500원
구매하기 교보문고 인터파크 YES24

준비되지 않은 개항,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강화도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租借地)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들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치외법권과 연해 측량권은 우리 주권에 대한 결정적 침해였다.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볼 때 개항은 시대적 대세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항은 미처 준비되지 않았던,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개항이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대로 가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인천 개항사를 통해 본 인천의 역사
제국주의의 거대한 풍랑과 집요한 외세의 힘의 논리 앞에서 마침내 조선은 개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근대화를 정박시킨 개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닻을 내려주었을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미미한 대처로 불합리하게 맞이한 개항, 그 중심에 인천 개항이 있다.
미래지식에서 출간한『인천 개항사』는 그러한 개항의 지난날을 알기 쉽게 펼쳐놓았다. 개항시대의 이야기와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천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제 『인천 개항사』가 잊혀 있던 인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저자 및 역자

저자 : 나채훈

1947년에 태어났으며, 인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세정대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여원’, ‘리빙뉴스’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소설 정관정요 1, 2, 3』, 『전략 삼국지』, 『카리스마 리더 조조』 등 다수가 있다.

저자 : 박한섭


1951년에 태어났으며,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사회교육학을 전공했다. 동아건설 근무, ‘차이나뉴스’ 발행인, 향토해설사로 활동했다. 현재 사단법인 인천문화발전연구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목차

책머리에

01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인천과 개항장 일대
1. 선사시대
2. 인천 이름의 유래와 미추홀

02 고려~조선후기까지의 중구
1. 대송(對宋) 무역기지 자연도
2. 말 목장 자연?삼목?용유도
3. 해안 방어의 요충 영종진(永宗鎭)
4. 월미도 행궁(行宮)

03 개항 전후Ⅰ
1. 대원군의 등장
2. 작약도 앞바다에 나타난 서양 함대
3. 운요호사건과 영종진 피격
4. 강화도조약, 개항의 문 열리다
04 개항 전후Ⅱ
1. 개항이 늦어진 이유
2. 인천의 개항, 조계제도의 성립
3. 혁명, 개혁의 소용돌이

05 개화의 물결
1. 북미 대륙으로 떠난 이민선
2. 인천 앞바다의 포성
3. 근대화되는 시설들

06 교통?항만과 상업 활동
1. 북미 대륙으로 떠난 이민선
2. 인천 앞바다의 포성
3. 근대화되는 시설들

07 근대문물의 전래
1. 기독교의 전래
2. 근대교육의 실시
3. 기상대와 문화시설

08 근대건축물의 명암
1. 현존하는 건축물
2. 소실된 근대건축물

09 항만 건설과 행정 개편
1. 인천항의 입지와 축항 개요
2.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및 인천

10 미곡의 수탈과 노동운동
1. 미곡의 수탈
2. 인천 지역의 노동운동

11 자주 독립운동과 일제의 발악
1. 김구의 독립운동과 인천
2. 3?1운동과 청년운동
3.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

12 8?15광복과 미군정
1. 해방과 함께 찾아온 미군
2. 당시의 경제 상황과 새교육운동
3. 신탁통치?단정 반대운동

13 대한민국과 인천시
1. 제헌국회와 6?25 사변
2. 인천광역시로의 발전

부록 개항장 일대와 부근의 지명, 그리고 변화
1. 개항 당시의 제물포 지역은……
2. 개화의 요람 중구 일대
3.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동구 일대

 


 

책속으로

일본의 교활함에 속다
초지진을 포격하고, 항산도에 상륙, 방화와 노략질을 하고 나서 영종진을 포격, 방화 노략질한 일본군의 도발과 만행이 있은 후 일본은 적반하장식으로 우리에게 도발의 책임 운운하면서 교섭 요구를 하였고, 우리 조선정부는 이에 끌려가 문호를 개방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혹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는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쇄국을 주장하던 조선이 개항의 조류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개항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조선정부가 개항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고 결국 대처방법이 너무 미비했다는 것입니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우리 측 협상대표인 신헌을 보면 그 일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는 병인양요때 공로를 세운 무관이었습니다. 치밀한 준비를 하고 들어온 일본의 ‘외교적 잔꾀’에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신헌과 일본 측 대표 간의 협상은 강화도의 연무당(지금은 터만 남아 있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요구대로 움직인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 p.73